덕수 이씨의 흔적을 만나는 송산면의 신도비와 회화나무
당진시 송산면에서 만나보는
신기한 역사 이야기!


당진 송산면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화나무가 있는데 괴목신은 회화나무에 곁든 귀신을 일컬으며 송와잡설, 임하필기등의 다양한 기록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나무를 심은 이행은 덕수 이씨 연헌공파로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고려 때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를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이행의 아버지는 홍주목사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敎理) 성희(成熺)의 딸로 건너편에는 이의무신도비도 자리하고 있는데요. 나무를 만나고 건너편으로 가봐야겠습니다.
 

당진시가 송산면 삼월리의 천연기념물 제317호 회화나무(송산면 창택길 39-2) 정비 사업으로 공원화를 추진하면서 이곳은 작지만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을마다 자리한 고목에는 정령이 있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존재하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월리 회화나무는 조선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행이 중종 12년(1517년) 관직을 그만두고 송산면 삼월리에 내려와 집을 지으며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심었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앞쪽의 공간으로 오면 도지정 기념물 제185호인 이의무의 묘 및 신도비는 당진에 있는데 덕수 이씨 묘역이 자리 잡은 그곳에는 이의무의 묘를 비롯하여 30기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산에서 가장 보기 좋은 위치에 묘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의무의 묘는 산 아래에 마치 공원처럼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앞에는 이의무의 공적을 기려 중종 35년 (1540)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습니다. 이의무는 세조 13년 (1467) 사마시를 거쳐 성종 8년 (1477)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소신대로 살다 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의무가 관직생활을 한 것이 30여 년인데 그동안 다양한 그의 행적이 이슈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1493년 홍문관 응교로서 특명을 받고 형벌을 남용해 사람을 죽인 임실 현감 노처원(盧處元)을 엄히 국문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노처원의 동생 노처리(盧處利)가 음모를 꾸며 해하려 하자, 이 사실을 알고 노처리를 잡아 장형(杖刑)을 가하다가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묘역의 건너편에는 이의무 선생의 호인 연헌을 따서 연헌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이 너무 좋아서 능안은 왕릉으로 사용될 뻔하기도 했으나 이미 덕수 이씨 가문의 묘역으로 정해져 있어서 풍수 명사와 이해관계가 있었던 주봉공이 부탁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온 이의무는 무오사화로 평안도로 유배되기도 하고 홍주목사로 있을 때는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관직생활을 30여 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 재산이 많지 않은 청렴한 생활을 했었다고 합니다. 기품과 도량이 활달하고 시문에도 능했던 이의무는 학문을 중요시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1510년 예조참판에 추증되고, 1516년 예조판서에 가증된 이의무는 청렴함을 추구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의무의 후손들은 이곳을 상시 개방하는 공간으로 놔두면서 수려한 자연환경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이 공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조용하게 거닐고 때론 가볍게 캠핑할 수 있도록 열린 곳을 지향하고 있는 여행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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