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운동과 대한민국 100년의 화두 심용환 작가 - 당진행복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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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19-03-26 조회 : 391

​대한민국으로의 정체성,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당진행복아카데미의 인문학 특강을 좋아하지만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렇게 매번 듣게 됩니다.
아무래도 시기적절한 강사님 캐스팅이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3월 하면 공휴일이자 잊지 말아야 일반 평민 출신들이 나라가 잃어버린 국권을 찾기 위해 스스로 봉기한 3.1운동 기리는 삼일절이 있는 날입니다.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고 당진에서는 3.10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운동과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으니 어쩌면 3월 전체가 삼일절 인지도 모릅니다.
 

최근 방송사 CBS의 북간도의 십자가 클립 영상의 심용환 씨를 보고 그가 출연한 방송을 다시 보는 중이었는데 이번에 당진으로 특강을 오신다고 하여 알림 문자를 받고 바로 신청했어요.
 

다소 딱딱한 강연장의 분위기를 녹이는 아미 나래의 난타공연.
멀리 가지 않아도 당진행복아카데미에서 심도 있는 인문학을 쉽게 접할 수 있어요. 일 년에 네 번뿐인 게 아쉽습니다.

 

3.1 운동 이후 단순히 100년이란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으로의 정체성 즉 우리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입니다.
 

먼저 1907년에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안도를 중심으로 결성된 이 조직은 조선왕조가 망하기도 전에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공화제도를 주장하였습니다. 평안도는 조선왕조의 역사의 변두리로 조선 중기 이후 정승이 난 적이 없었습니다. 주로 상인들이 많아 신분의 구별이 없고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왕조의 그늘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신민회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이죠.
그러나 그의 업적 중에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무한도전에서 봤던 미주의 한인 노동자들의 돈을 모아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했다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는데요. 그럼에도 임시정부 수립에서 운영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임에는 확실합니다. 윤봉길 의거 때문에 체포되는데 이때 자금과 물품을 제공했던 것이 안창호 선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의 뒤편에는 언제나 안창호 선생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무래도 아나키스트의 이미지가 아닐까요? 그래서 더더욱 안창호와 같은 캐릭터가 없는 것 같아요.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하기 때문에서 인지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경우 타협하고 소통하는 방식에는 다소 약했습니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은 언제나 대화하고 소통하고 화합하려고 했으며 그래서 영향력이 컸음에도 불구 수장은 맡은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주에서 현재 시가로 5억 정도 되는 자금을 지원했음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보다 임시정부 노동부 총판 (현재의 장관) 말진에 가까운 자리에 취임했습니다.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고 안창호는 외교독립 론도 인정하나 무장투쟁도 가능한 입장으로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점차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안창호 입장에서 미주 지역의 경쟁자이지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임한 사람이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3.1 운동의 배경이 된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한 윌슨 대통령이 프린스턴 출신이고 이승만 역시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학위 취득한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미국 유학파 타이틀로 내세울 만한 이승만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게 된 거죠. 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그 반대를 설득한 사람이 안창호 선생입니다. 인상적인 선택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



여기서 안창호의 소통과 타협의 리더십 정신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의 근현대사의 독립운동 가는 무조건 존경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긴 하지만 인사이트는 주는 롤모델로써 다각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안창호의 리더십은 미래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 학자의 7-80%는 의병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방향성의 부재라는 한계 때문입니다. 일본군을 막아서 싸운다고 한들 결국 신분제로 돌아갈 것입니다. 의병항쟁 중에도 나쁜 신분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며 평민 의병 바른 소리 해도 맞아죽고 양반 의병의 말이라면 받들어야 했습니다. 신분제를 타파하고자 한 근대의 역사 흐름과는 다르죠.
 

그렇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는 새로운 국가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왜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시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에 본인의 삶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꾸었던 꿈은 단순히 독립을 넘어선 이상적인 국가 설립의 꿈이었습니다. 의병과 다른 점은 단순한 조선 독립이 아닌 미래에 대한 방향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80년 전 임시정부가 꿈꿔왔던 나라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헌법 10조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심용환 강사님은 본인이 TV에서는 재치 있는 캐릭터로 나오지만 그건 다 편집의 힘이라며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는데^^ 네 사실 받아 적은 내용을 다시 보니 이게 정말 한 시간 동안 한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웃음 기업이 진지한 강의였습니다. 해방된 조선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바랐던 이상적인 국가의 첫 시작이 당진에서부터 시작하는 하는 꿈을 조심스럽게 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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