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을 이어온 어머니의 손맛을 찾아 떠난 어죽 이야기
배숙 어머니 이야기

배숙(79세) 어르신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55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배숙 어르신이 시집을 가던 1960년대는 세계 대전 이후 성장기 과정을 거치는 시기였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배숙 어르신은 시집을 갔지만 상당히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힘들고 어렵던 시절, 이곳 면천 저수지가 조성된 곳으로 이사를 왔다. 작은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짓고 저수지에서 투망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았다. 처음에는 잡은 물고기를 끓여 먹기 시작하다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때로는 손님들이 고기를 잡아오면 밖에 솥을 두고 끓였다. 장작불을 피워 고춧잎, 깻잎을 따다가 넣었다. 국수를 넣어 양을 늘리고 먹었던 것이 지금 어죽의 시작이 되었다. 배숙 어르신은 이곳 면천에서 어죽을 그렇게 시작했다.
 
 
 

늦은 주말에 노각, 열무, 호박지를 가지고 김치를 담그는 어르신을 다시 찾아 나섰다. 못다한 이야기 꾸러미를 많이 풀어놓길 바랐으나 상당히 수줍어 하셨다. 지난날 경제적으로 힘들고 못살던 우리네 과거 이야기가 또 하나의 소재가 된다는 것이 쑥쓰러운 것일까. 주름진 얼굴에서 지난 고된 세월의 흔적을 역력히 찾아볼 수 있었다.
 

늙으막에 사진을 찍는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닌가 보다. 그래도 5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손맛을 고스란히 지켜낸 어르신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어죽과 매운탕, 여러 밑반찬이 배숙 어르신에게서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김치는 거의 매주 담그신다. 손님들이 자주 찾는 어죽집이다보니 금세 김치는 동이난다. 전화를 하여 먹고 싶은 반찬이 있는지 물어보는 손님도 종종 있다. 손님들이 헛걸음 하지 않도록 오늘도 어르신은 열심을 내어본다.
 

어머니의 딸 황춘숙 씨를 만나보았다. 상호명에서 특별함이 더해진다. 딸이 7명이다보니 쉽게 딸부자라는 이름을 생각하게 되었다. 영업장을 본격적으로 낼 때는 군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딸이 많은 것이 가족사의 하나여서 딸부자집으로 이름난 곳이다.
 
 

황춘숙 씨는 어릴적 아버지와의 추억을 생각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저수지에서 고기를 잡으셨다. 투망을 가지고 잡으면 양동이에 고기를 잡아 넣었던 기억이 많이 있다.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기억들, 자식들이 많았던 시절에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가정을 이끌어 가셔야했다. 부모님과의 추억 속에는 어린 시절이 많이 남아있다. 어죽을 머리에 이고 낚시하는 손님들에게 배달을 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한 손에는 막걸리와 물을 들고 어머니를 따라가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 어죽집을 운영하고 함께 하면서 재미있는 순간들이 참 많다. 또 하나의 즐거움인 듯하다. 손님들이 식당에 찾아왔을 때 "몇분이세요"라고 하면 "세봐유~" 하고 넌지시 웃음을 만들어 주는 손님, 두리뭉실 손님 수를 이야기하며 서로 웃곤 한다. "식사 무엇을 드릴까요?"라고 하면 "그냥 그거 줘유, 우리 뭐 준데유?" 라고 말하면서 함께 웃는다. 어죽집에서는 그렇게 또다른 즐거운 웃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준데유, 그냥 그거 줘유"라고 주문하면 그것은 '어죽'이라는 얘기다.

어죽을 드시는 어떤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식사를 못하시던 중 이곳에서 어죽을 드셨다. 모두 드신 후 어죽을 끓인 주인을 홀로 불렀다. 갑자기 손에 만원을 주시며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라고 따뜻한 마음을 전한 할아버지가 계셨다. 생각지도 못한 할아버지 반응에 감동이 되었다. 내 가족을 섬기듯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드린 것 뿐인데 말이다. 이곳 어죽집에는 김치가 맛잇다고 배우러 오시고 싶은 분도 찾아오시고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단골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

 
 
 
 

식당 홀에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소품 속에도 사연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처음, 식당 홀 안에는 수족관이 있었다. 황춘숙 씨는 수족관을 치우고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서 힘들었는데 꽃을 키우면서 사라졌다. 식당일이 무지 힘든 일인데 피곤한 것들이 사라졌다.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쉬는 날이 되면 만들기를 배웠다. 여유가 찾아오는 날에는 시간을 따로 내어 도자기를 배우고 만들기 취미생활을 했다. 자기 계발과 관리를 통해 힐링의 시간을 따로 가져보았다. 때로는 음식도 예쁜 그릇에 담고 싶었다. 음식을 예쁜 그릇에 담아 손님들에게 드리고 싶었다. 꽃잔에 담듯 음식을 그렇게 담아내었다. 황춘식 씨가 손수 만들어 놓은 소품을 보고 있노라니 음식에 대한 소신이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것 같다.
 
 
 
 

어죽 이야기

여름 햇살이 계절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래듯 요란하다. 면천지 낙시터에서 배숙 어머니가 보내온 지난 삶을 되짚어 보았다. 이른 새벽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운치도 더했겠지만 수많은 삶의 노래가 이곳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하니 바라보는 내내 55년 전의 오래된 과거가 오버랩되었다.

 
 
 

손님들은 오늘도 그리운 옛맛을 느끼고 싶어 이곳에 찾아왔다. 오픈을 한 지 시간이 지나고 늦은 점심임에도 손님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었다.
 

어죽집답게 소품들도 이색적이다. 섬세한 주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손님이 어죽을 주문했다. 함께 음식을 주문해 보았다.
 

이곳은 직접 농사를 지어 그 재료로 어죽에 넣는다. 밑반찬이 되는 모든 야채 재료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밭에서 가지고 온 재료들이다. 어르신이 직접 지으신다. 들깨가루에 이르기까지 어르신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다. 그야말로 건강식이었다.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신 손맛이 느껴졌다. 이름하여 '집밥'이다.

내가 먹는다는 마음으로 손님에게 대접한다는 주인장의 소신이 생각났다. 고향의 맛, 엄마의 맛이라는 게 이 맛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일부러 묵은지, 호박지를 드시러 오시는 분이 계신다고 했다. 무청을 소금에 절여 두었다가 여름에 삶아먹는 꺼먹지를 드시러 오시는 분도 있다. 기억 속에 서서히 사라진 고향의 내음을 이곳에서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맛을 그리워하는 손님들이 찾는 이유 중에 하나리라.

집을 새롭게 개조하고 싶지만 아늑하게 찻집 분위기도 그리 나쁘진 않다. 황춘숙 씨는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어했다. 어죽과 매운탕으로만 55년을 이어온 어죽 집이기에 그 맛을 지키고 싶었다.

손수 재배한 고추와 김치 재료들로 오늘도 어머니와 딸은 함께했다.
 
 
 
 
 
 

잔잔한 풍경소리와 함께 하루가 다시 저물어 갔다. 봄이면 곱게 꽃이 피어 있는 집, 가을이면 형형색색으로 꽃물이 들어있을 예쁜 길가에 오늘도 소담스럽게 옹기들이 모여있었다.
 
 

펌프질을 하여 물을 사용하던 수돗가도 눈에 들어왔다. 마중물이 물을 끌어 올리듯 어죽집의 옛맛이 당진의 맛을 끌어올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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