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와 당진대도소 고택복원 재조명 학술대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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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19-09-30 조회 : 277
"손병희 선생의 당진 은거지 발굴, 연구 결과 발표"
 

지난 9월 24일(화)에는 당진문화원에서 ‘의암 손병희와 당진대도소 고택복원 재조명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주최하고 동학혁명기념사업추진단에서 주관한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천도교) 지도자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셨던 의암 손병희 선생과 관련된 것으로 한양대 윤석산 명예교수의 기조강연( ‘의암 손병희의 사상과 당진대도소’)을 시작으로 주제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본 글을 읽으시면서 “......그런데 대체 당진과 손병희 선생이 무슨 관계가 있지?!”라는 의문을 가지실텐데요, 알고 보니 손병희 선생이 길지 않지만 당진에 은거하셨다고 합니다. 제1주제 발표자였던 이동초 교수님의 발표문을 참고하면 천도교회사에 손병희 선생께서 당진군 모동 우물이 있는 집에 거처하셨다는 기록이 있어 오래전부터 수소문하셨다고 합니다.
 

당진에 지명이 비슷한 곳도 가보고 밀양 손씨가 많이 살고 있는 고대면 진관리도 가봤지만 찾지 못하셨다고 하네요. 그러던 중 2011년 당진읍지에 필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당진지역의 천도교활동’에 대해 집필을 하면서 당시 같이 읍지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당진향토사학자 윤성의 선생 그리고 당진시 문화재팀 남광현 팀장과 함께 다시 찾기 시작하면서 결국 손병희 선생이 은거했던 모동과 천도교 당진교구의 위치를 찾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진의 손병희 선생 은거지를 찾는 과정은 더욱 드라마틱한데요, 모동 즉 지금의 수청동 지역을 방문해
1. 100년 이상 된 오래된 집 2. 집 앞에 우물이 있는 집을 찾기 시작했다네요.

그러다가 지역 어른에게 증언을 듣게 되었고 은거지로 유력 시 되는 빈 고택을 방문, 전에 우물이 있었던 정황도 파악이 되면서 손병희 선생의 은거지로 확신을 갖게 되었답니다. 지역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당진시청 뒤쪽이 수청동인데요, 이곳은 현재 수청2지구 도시개발사업지구로 개발이 한창이죠. 은거지 발견 시기가 이제 막 개발이 진행될 때라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학술대회에 바로 이러한 연구 및 발굴 사실들이 발표되었습니다. ‘대도소’라는 단어가 생소하실 텐데요, 대도소는 오늘날의 천도교 중앙총부 역할로 교주가 머무르는 곳이 바로 대도소가 된다고 합니다. 당진에서 손병희 선생은 1899년 3월 10일 춘암상사에게 춘암의 도호를 주는 일을 하였으며 4월에는 어육주초를 금하는 글을 펴 전국의 동학교도들로 하여금 기도 중에는 어육주초를 금하도록 명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7월에 ‘각세진경’을, 8월에 ‘명심장’ ‘우음’ 등을 지어 제자들에게 반포하였고 9월에는 ‘통유문’을 발하여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알렸다고 하네요. 즉 당시 당진군 모동에서 손병희 선생은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가르침을 폈고 또 ‘통문’ 등을 돌리면서 지도하고 관장을 했기에 동학 대도소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학술대회 책자와 내용을 참고하면 1898년 8월경 손병희 선생께서 당시 당진군 동명 모동(지금의 당진시 수청동)에 내려오셨고 이곳에서 약 1년 넘게 거처하면서 전국 동학교도를 지휘하는 한편 이후 당진을 떠나 일본에 머물며 인재들을 모아 일본에 유학을 시키는 등 기울어가는 나라를 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합니다.
 

현재 손병희 선생의 은거지는 개발로 인해 사라졌지만 고택을 해체하여 부재를 합덕수리민속박물관에 보관, 차후 개발이 끝나면 이전 복원하는 한편 고택 정비사업을 통해 지역의 동학과 독립만세운동 관련 활동과 연구의 허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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