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공립보통학교 3·10만세운동
등록일 2017.03.09 조회 564






 





 






 






 





 





 






 





 





 





 






 






 





 





 





 






 





 

독립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만세 운동>

"3월 초하룻날 서울 탑골공원. 자네들도 그 광경을 봤어야 하네.  
남녀 학생, 군중들 20만 시민들이 다 모인 것 같았지.”  

“대한독립만세”

이 이야기는 3.1 독립만세 운동을 목격한 원용은에게서 시작합니다.


“우리집 논을 판 돈으로 산 당목과 물감이네. 이 태극기로 동지들과 민족의 독립을 외치세”

-원용은


원용은의 증언은 나와 박창신의 가슴속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곧 거사 일을 정했습니다.


3월 10일

그날은 일본 정부가 봉천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지정한 기념일이었습니다.

※ 봉천 전투 (1905. 2. 20 ~ 3.10) 20일간 러시아와 일본군 60만 명이 참여한 지상전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불림.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인면수심"

-주변의 학교에게 돌린 밀지-


돌아온 답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날 수업이 없는 오후를 틈타

오후 4시까지 동문 밖 골짜기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골짜기에

96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같이 기쁜 마음으로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원용은

파란 하늘, 우리가 만든 태극기는 바람에 날려 용이 꼬리치듯 펄럭였고

함성은 점점 커졌습니다.


"대한 독립 만세"

두려움은 뜨거운 용기와 간절한 열망으로 바뀌었고, 

만세 행진은 골정지를 지나 학교 정문을 향했습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대한 독립함성 

10년을 참고 참아 인제 터졌네!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피 이 뼈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조선 것이다.

-독립의 노래-


공립 보통학교 정문을 지나 우리는 면천 주재소를 향했습니다.

결국 주재소 일본 경찰들에게 태극기와 깃대, 만장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총에 맞지 말라, 도망가라" 

선생님들의 목멘 외침에 학생들은 곧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이미 우리들의 가슴에는 독립의 불씨가 싹터 횃불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틀 뒤 공주 헌병대는 원용은(17), 박창신(19)을 주모자로 체포했고,

공주 형무소에서 4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룬 뒤 학적까지 말소되고 퇴학당하였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함성이 생생합니다. 함께했던 수많은 동지들. 

면천 시내에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은 우리의 혼을 흔들고 민족의 염원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조국의 독립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이 기사는 1977년 3월 10일 

당시 4학년 이종원 급장의 회고록을 1인칭 관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1919. 3.10만세 운동은 충남지역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최초의 독립운동으로

향후 충남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일어나게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된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영상캡쳐> TJB 창사특집 100년을 거슬러 면천을 만나다

<자문> 김남석 호서고 교사

제작 : 당진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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