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6월 / 소난지도 의병총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국사편찬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신 신양웅 전 석문중학교 교장선생님깨 들어보는 소난지도 의병총과 의병 이야기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국사편찬회와 향토문화연구소 회원으로 활동 중인 신양웅 前석문중학교 교장선생을 만났습니다.
학생들로 인해 시끌벅적했을 석문중학교 교정은 코로나19의 여파로 인해 6월의 내리쬐는 햇볕 가운데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신양웅 선생님께 듣게 될 소난지도 의병총에 관한 이야기를 예상하며 교장실로 이동하는 복도에는 수업을 진행하는 이름 모를 교사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렸고, 마치 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설레는 기분을 안고 교장실에 도착했습니다.

주무관
: 안녕하세요 선생님.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당진시에서 활약한 의병과 소난지 섬의 의병총에 대해 이야기 나누려고 하는데요, 선생님의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신양웅 선생님
: 충남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석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쳤으며, 역사, 향토사, 고고학에 흥미가 있어 80년대부터 활동해왔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무척 유쾌하고 재밌으신 분이셨어요

신양웅 선생님 약력
前 당진문화원 이사
前 당진중학교 교장
前 당나루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現 국사편찬위원회 회원
現 향토문화연구소 회원

 

주무관
: 선생님께서 역사와 향토사,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양웅 선생님
: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던 시기에 당진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돌도끼)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왜 당진에서 이러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이 생기던 중 양봉을 하시던 교장선생님의 양봉 틀을 받치던 독특한 모양의 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에 마곡석이라 불리던 갈돌이었었습니다. 그래서 이 근처에 갈돌의 아래짝인 갈판이 있을 것 같아, 학생들에게 갈판의 모양을 설명하고 수소문하던 중 한 학생에 의해 갈판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진에서 발견된 갈돌과 갈판은 충남대 윤모병 박사에 의해 고고학계에 발표됐고, 마곡석이라고 알려졌던 돌이 갈판과 갈돌이라 명명되었습니다.
학계의 발표 이후 전국에서도 갈돌과 갈판이 출토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와 향토사, 고고학 등에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난지도 의병 조형물
주무관
: 이제 당진시 소난지도 의병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의병들이 어떻게 당진의 소난지 섬에 모이게 됐나요?
신양웅 선생님
: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한국 군인의 강제 해산 등으로 홍원식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거병하였습니다.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이들은 경기도 수원 지역에서 유격 전술로 일본군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지만,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 일본군에 밀려 배를 타고 당진으로 쫓겨 왔습니다. 그리고 병오년 홍주 전투에서 패한 의병들과 합류하면서 석문면 난지도에 의병 본진을 두고 재기를 도모했습니다.
당시 소난지도는 마포로 가는 3남지방의 조세선이 정박하는 중간 정박지 역할을 했기에 식량이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주무관
: 난지도에서 전쟁자금을 마련하고 해로를 이용해 일제의 주재소를 야간 습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네요. 그렇다면 결과는 어땠나요?
신양웅 선생님
: (당진지역)의병활동일지에서 찾을 수 있는 의병 관련 활동만 50여 건인데요, 화승총을 사용하는 의병들은 38식 소총(명치)을 사용하는 일본군에 비해 매우 불리했습니다.
기록할만한 전투는 세 건인데, 1906년 8월 일본경찰대의 소난지도 급습으로 최구현 의병장이 면천성에 갇혀 1907년 2월 옥고를 치르다 순사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정주원 의병장이 소난지 항전에 대한 복수전을 벌였지만 일제에 체포되어 종신유배형을 당했고, 1908년 3월에는 일본 순사로 위장한 급습에 홍원식 지휘 아래 의병들이 41명 전사, 50여 명 행방불명, 9명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홍원식 의병장은 절벽에서 투신하였으나 나뭇가지에 걸려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1908년 3월의 전투에 대해 이곳 점 주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섬에 온종일 총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렸고 화약 연기가 섬을 뒤덮였다고 합니다. 총소리에 놀란 어떤 부인은 아이를 업고 피난 간다는 것이 급해서 베개를 안고 갔다고도 하며, 당시 배를 가지고 다니던 장고항 거주자 김증삼은 소난지도에 있다가 두려운 마음에 날씨가 춥고 바닷물이 차가운데도, 소난에서 대난지도로 수영을 해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주무관
: 이렇듯 역사적으로 확실한 부분인데, 처음에는 고증이 없어 소난지도 의병총이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양웅 선생님
: 의병총의 한 맺힌 역사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970년도부터입니다. 당시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과 김부영 교장이 소난지도를 방문했다가 구덩이로 남아 있는 의병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전설처럼 구전되던 의병들의 항쟁사는 잊힌 상태였고, 목 부위에 단단한 멍울이 생기고 부스럼이 퍼지는 연주창에 유골이 약재가 된다는 미신 때문에 의병총을 도굴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석문중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은 1973년 의병총을 보수·정화하였으며, 1974년부터는 당시 목격자 조예원 옹과 소난지도 주민 최을용 씨 등의 증언을 청취하여 문헌조사에 착수, 1980년 6월 소난지도 의병총 건립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소난지도 의병에 대한 기록은 한국유적총람(문공부편)의 의병총 자료밖에 찾지 못해 확실한 고증이 없는 상태였는데, 박상건 학술 부회장이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주경찰서 홍주분서에서 경무국장에게 보고하는 소요손해주표에서 1908년 3월 15일 소난지도 전투상황이 기록된 자료를 찾게 되어 학술적으로 인정받게 됨은 물론 소난지도 의병총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주무관
: 듣기로는 의병총의 분봉을 만드는 일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신양웅 선생님
: 앞서 거론한 것처럼 당시 소난지도는 조세선이 정박하던 정박지였기에 비교적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마을에 양조장이 2곳이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의병들이 소난지도에 주둔하며 120가구 정도 되던 주민들은 집을 내어주고 음식도 제공해야 했습니다. 최을용 씨의 증언으로는 의병들이 대산면 삼길포에서 건너와 주민들의 방을 빼앗고 반찬과 밥을 짓게 시키고 가축을 잡아먹고 심부름도 시키는 등 민폐를 끼쳤다고 합니다.
후에 의병들의 봉분을 만들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야만 했는데, 마을 주민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소난지도의 상당한 유지였던 최을용 씨의 주민 설득에 힘입어 결국에는 봉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주무관
: 소난지도 의병 항쟁은 우리 후손들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촉매제가 되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당진시민들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실까요?
신양웅 선생님
: 당진시에서 면천읍성 복원을 진행하는 일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당진시의 향토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도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향토문화가 잘 전달되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정신이 대대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한편 6.25를 겪은 세대로,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인민군이 당진에서 퇴각하면서 마을 아저씨와 주민 등 20여 명이 석문면 노학산에서 잔인하게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저희 집은 집과 재산을 빼앗겼으며, 강제로 부역도 해야 했습니다. 석문은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이기에 당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공산당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색을 하게 되었는데, 요즘은 휴전 상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이 전쟁의 무서움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올바른 교육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맺음말
2시간 가까운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신양웅 선생에게서는 조금도 지친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81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열정이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신양웅 선생을 따라 간 석문중학교의 유물실에서, 당진에서 발견되었다던 갈돌과 갈판을 실제로 볼 수 있었는데, 문득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당진시의 향토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도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신양웅 선생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당진시민들이 당진의 역사를 배우고 후손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숭고한 의병들의 항쟁과 희생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으며 신양웅 선생과 함께 유물실을 나왔습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