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사찰여행, 가을이 익어가는 영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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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19-11-15 조회 : 519

"충남 당진의 사찰여행, 영탑사의 가을이 익어간다!!​"

 

입동이 지나고 서리가 내리니 가을을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오는 것 같아 조급한 마음입니다. 가을 단풍이 들 때면 꼭 들러봐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영탑사를 시작으로, 충남 당진의 사찰 여행을 하려고 합니다.

가을이 가기 전 서둘러서 영탑사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어느덧 한 해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이 내 발걸음보다 앞서갑니다. 마을 길을 따라 영탑사 방향으로 갑니다. 절골 저수지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놓고 경내를 향해 걷노라면 어느새 가을이 눈앞에 들어와 있습니다.

영탑사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로 139-33 (성하리 산 67)에 주소를 두고 있습니다.

면천면 성왕산의 연화봉에 위치한 영탑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의 유서 깊은 사찰로 , 제7교구 수덕사에 속한 말사입니다. 신라 말엽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영탑사 내에 현존하는 불상과 석탑 등을 고려해 볼 때 고려 시대에 초창 되어 현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랏빛으로 우리를 흠모하게 했던 맥문동 꽃들이 지고 이제는 까만 열매로 영글어 있고, 나뭇잎들은 한 잎 떨궈 겨울을 준비하느라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영탑사의 배경 음악이 되고 있습니다.

영탑사의 대웅전입니다. 대웅전 앞과 계단에 놓여 있는 국화 화분으로 가을향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대웅전이 없었는데 신도들의 모금과 정부 보조금으로 1990년에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대웅전 뒤로 울창한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고 앞에는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영탑사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적묵당 마루에는 둥근 호박 네 개가, 나란히 나란히 줄지어 있는 모습이 미소 짓게 합니다.

귀엽고 예쁜 호박은 누가 이렇게 줄지어 놓았을까요?

대웅전 한쪽에는 영탑사 범종이 걸려 있는데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19호입니다.

1760년(영조 36)에 만들어진 범종으로 높이가 60센티미터이고 밑지름이 46센티미터인 종입니다. 가야사 법당에 있는 금종을 백근의 쇠를 녹여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덕산, 홍주, 면천 지역에서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종은 가야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가야사는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불태워진 절입니다.

대웅전에서 나와 금동 비로자나불 삼존좌상이 모셔져 있는 영탑사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안을 보려고 기웃거리고 있는데, 마침 안에 두 분의 스님이 담소 중이셨는데 들어오라 시며 커피 한 잔을 대접해주셨습니다. 잠시 앉아 이얘기 저 얘기 나누던 중 적묵당 마루에 있는 호박을 보았냐고 스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아침 일찍 따다가 마루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줄지어 놓여 미소 짓게 했던 그 호박 이야기입니다.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의문을 가졌던 것이 해결되었답니다.

금동 비로자나불 삼존좌상은 1964년 9월 5일에 보물 409호로 지정받았고 높이 51센티미터인 고려 시대 금동불입니다.

1975년 도난당했다가 1976년 12월 14일 일본으로 밀반출 직전에 다시 찾았다고 하는 삼존불상은 보존 상태가 좋고 고려 전기 불상 양식의 한 단면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합니다.

삼존불상을 보고 나와 산신각을 보고 요사채를 지나니 약사여래상을 모신 유리광전이 나옵니다.

유리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상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마애불입니다.

마애불이란 암벽에 새겨진 불상을 말합니다. 상왕산 연화봉에서 옮겨온 약사여래상은 3.5미터의 좌 불로 현재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자연 풍화되어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하반신은 잘 보이지 않으나 얼굴의 형체는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고 거구의 당당한 면모나 광배를 대신하고 있는 자연석의 웅대하고 기이한 모습에서 강한 인상을 줍니다.

약사여래상을 등 뒤로하고 대웅전 쪽을 바라보는 풍광이 멋집니다.

한동안 넋 놓고 앉아 있노라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온 가을이 내 품에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댓돌 위에 놓인 나의 신발은 홀로 즐기는 이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밖으로 보이는 요사채의 모습도 한 폭의 그림입니다.

유리광전 뒤로 올라가면 7층 석탑이 보입니다.

7층 석탑은 기단을 추구하지 않고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세워진 탑입니다. 5층만 남아있던 것을 1911년 신도들이 다시 7층으로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석탑은 고려 중엽 보조선사가 사방 앞의 정원에 건립한 것인데, 고려 말엽 무학대사가 유리광전 안에 있는 마애불을 조각하면서 석탑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바위를 기단 삼아 7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이 탑은 바위와 탑이 만나는 부분이 조금 어긋나 있어 원래의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7층 석탑을 둘러보고 이제는 의두암을 보려고 산길을 걸어갑니다.

앞서서 가고 있는 저 여인의 가을은 어떤 색일지 궁금해집니다. 가을색이 완연한 숲길을 걸으니 솔향과 풀 내음에 상쾌함이 있습니다.

산길을 오르다 보니 의두암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계단을 따라 조금 올라가 봅니다

한말의 운양 김윤식(1835-1922)과 관계있는 바위가 나옵니다. 운양 김윤식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에 반대하며 대원군의 집권을 모의하다가 미움을 사게 되어 1887년에 일상차관 문제의 책임을 지고 면천에 유배되었습니다. 유배시절 영탑사에서 기거한 적이 있는데 1893년 유해형이 끝날 때까지 7년을 면천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61세에 해제되었다고 합니다.

의두암은 자연암벽으로 산 정상 못 미쳐 큰 바위가 우뚝 서 있는 형상이고, 높이가 4m 정도에 3층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수직 벽면에 예서체로 ‘의두암’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글씨를 새긴 사람은 구한말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였던 운양(雲養) 김윤식(1835~1922)입니다.

김윤식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있는 영탑사 아래 절골에서 6년간 유배살이를 하였는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의두암에 올라 시문도 짓고 주연도 즐기고 활도 쏘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두암에 앉아 북쪽의 임금을 생각하며 죄를 짓고 남쪽으로 유배 온 자신을 한탄하였다고 일기인『속음청사(續陰晴史)』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윤식은 『속음청사』를 통해 "의두암은 연화봉 왼쪽에 있는데, 3층 석벽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올라앉으면 멀리까지 볼 수 있는데, 날이 좋고 구름이 없는 맑은 날에는 아미산, 다불산 사이로 서울의 산과 강화 마니산이 모두 보이기 때문에 ‘의두암’이라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윤식은 의두암을 각별히 생각하여 음력 1888년 7월 4일 두 명의 석공을 불러 벽면에 ‘의두암’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의두암 옆에 진달래가 철모르고 피어 있었습니다.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어찌하다 때를 모르고 피었을까 싶었답니다.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변하니 사람도 변화에 적응해야 하지만 진달래꽃마저 우왕좌왕하며 변화에 순응해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얼마 남지 않은 가을 풍광을 마음껏 보고 느껴 보았습니다.

산사에 오면 모든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영탑사에서의 가을날을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온몸 가득 가을을 품고 갑니다. 산사의 겨울 채비를 위한 배추들이 밭에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진의 사찰, 영탑사를 돌아보는 아름다운 여행이었습니다.

♦ 대한불교조계종영탑사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성하로 13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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