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에 축조된 충청남도 기념물 면천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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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 2019-10-14 조회 : 261
"새로운 역사문화관광자원이 되어 문화적 경제적 활성화를 이루기를"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방어를 목적으로 산이나 강 그리고 바다를 끼고 성을 구축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고창읍성,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처럼 평지에 성을 쌓은 곳도 있는데 면천읍성 또한 평지에 축성을 하였답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된 면천읍성은 당진군 면천면 읍내에 일부분만이 남아 있었는데 2007년부터 면천읍성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데 현재 서벽 및 치성이 정비되었다. 또한 면천읍성 내 영랑효공원이 조성되었으며 읍성 남벽(135m)과 남문이 복원됐으며 장청이 복원공사를 통해 지어졌고 성안마을에 건물이 복원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옥집과 초가집 등 저잣거리도 들어서는 등 복원이 되어 작은 민속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부근에 있는 110년 전통의 면천초등학교와 면사무소도 철거되었고 정밀 발굴조사를 거친 뒤 조선시대 관아로 복원이 될 예정이니 기대가 크답니다.
 

면천에 이토록 큰 읍성이 있는 것은 이곳이 1914년까지만 해도 면천이 당진과 맞먹는 중요한 군소재지였기 때문이었지요. 기지시 등도 면천에 속해 있었으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고 그 당시에도 면천은 당진이나 예산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기도 했지요.
 

​면천읍성은 둘레 약 1,200m로, 평면은 네모꼴에 가까운 타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 마련된 종합적인 왜구 방어 대책으로서의 읍성 축조 계획에 의하여 축조된 것으로 남문에는 성문을 방어하는 옹성이 있으며, 문루가 남문과 서문에 있었지요. 면천읍성은 조선 후기까지 면천의 군사와 행정의 중심 기능을 하였어요.
 

당진시에서 면천읍성 복원 및 정비 사업이 추진 중인 가운데 면천 지역의 주민들도 개발에서 소외됐던 면천지역에 읍성 복원·정비 사업을 추진해서 면천읍성이 지역의 새로운 역사문화관광자원이 되어 문화적 경제적 활성화를 이루기를 바라고 있지요.
 

사실 면천읍성은 단순한 읍성의 가치를 넘어 역사적으로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조선 전기에는 맹사성이 지군사로 근무했고, 후기에는 연암 박지원이 지방관으로 3년간 근무하면서 농서 <과농소초>와 목민서 <칠사고> 등을 저술한 역사적 장소이니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만으로도 가치 있는 곳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져야 하지요.
 

면천성은 당진의병 전투지이기도 합니다.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 및 관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막혀 물러났지요. 당진의병의 면천성 공격을 이끈 의병장 최구현은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퇴하였습니다. 최구현은 면천선 전투후 36명의 의병을 이끌고 소난지도에 들어가 재기를 도모하다가 8월 24일 일본군에 붙잡혀 희생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陳)을 지키는 중앙군과 지방의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군교들이 업무를 보살피는 청사라고 합니다. 1872년 면천 고지도에도 장청이 확인되었습니다. 당진시에서는 2017년 발굴에서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로 하여 2018년에 장청을 복원하였습니다.
 


♦ 면천읍성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몽산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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